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콜트레인 (문단 편집) == 생애 ==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햄릿]]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색소폰과 [[클라리넷]] 등의 연주법을 익혔다. [[1945년]]에는 [[미합중국 해군|해군]] [[군악대]]에 [[입대]]해 [[하와이]] 소재 해군 [[빅 밴드]]에서 연주했고, [[1946년]]에 [[전역]]한 뒤 [[필라델피아]] 출신의 기타리스트 데니스 샌돌에게 재즈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을 배웠다. 이후 이런저런 빅 밴드 등에서 연주 활동을 벌이다가 [[찰리 파커]]를 비롯한 신인 연주자들이 들고 나온 [[비밥]]에 푹 빠졌고, 이내 [[뉴욕]]을 거점으로 삼아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한 초기 밥 연주자들과 여러 세션이나 공연, 녹음에 참가했다. 1950년 초기에는 실력이 소니 롤린스보다 못해서 기가 죽어있었지만(마일스 자서전) 초인적인 연습량과 콜트레인만의 강한 캐릭터를 지닌 연주로 세기의 거인이 되었다. ||[[파일:attachment/potpargilcol.jpg|width=100%]][br]당시 콜트레인의 존재감을 잘 설명해 주는 역사적인 사진.[br]왼쪽부터 토미 포터,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그리고 콜트레인이다.|| 1955년에 스승인 샌돌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퀸텟(5중주단)에서 소니 롤린스가 탈퇴한 뒤 새로운 색소포니스트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콜트레인을 추천했다. 당시 마일스는 [[헤로인]]에 쩔었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하드밥의 유행에 맞추어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 젊고 이론에도 꽤 빠삭했던 콜트레인을 적임자로 여겨 멤버로 영입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한 기간은 1957년까지로 3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이 그룹의 최고 명반들이자 하드밥의 전설적인 결과물로 손꼽히는 '~in' 시리즈' 인 Cookin', Relaxin', Workin', Steamin' 네 장의 음반 등이 프레스티지에서 출반되었고 메이저 음반사였던 컬럼비아와 계약 후 처음 내놓은 'Round About Midnight'도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콜트레인도 [[마약]]으로 헤롱대던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클럽 공연 도중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는 등(...) 상당한 막장 행보를 보여주었다. 마일스는 참다 못해 1957년 4월 중순에 콜트레인을 그룹에서 짤라버렸고, 동시에 마일스 퀸텟 1기의 역사도 끝나 버렸다. 방출 직후 [[필라델피아]]에 있던 친가에 틀어박혀 힘들게 마약을 끊은 뒤, 5월 말 [[뉴욕]]으로 돌아와 마일스 퀸텟 시절 음반사인 프레스티지에 자신의 첫 리더작 Coltrane을 취입했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블루 노트 레코드]]와 녹음한 첫 앨범이자 두 번째 리더작인 [[Blue Train]]으로 생애 첫 대박을 쳤다. [[대한민국|한국]] 팬들의 경우 이 Blue Train 앨범을 통해 콜트레인을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다. 또 버드 파웰을 통해 약에 헤롱대던 천재삘 나는 연주자들의 행보에 본의 아니게 꽤나 익숙해있던 [[델로니어스 몽크]]의 쿼텟(4중주단)과도 잠시 어울려 연주했고, 이들이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실황으로 제작된 음반도 명반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프레스티지와 블루노트에서 번갈아 가며 녹음을 했는데, 프레스티지에서는 아직 블루노트 만큼의 성과가 없다고 여겼는지 후속작으로는 1958년에 Soultrane를 정발하는데 그쳤다. 대신 계속 녹음은 하되 테이프를 음반화하지 않고 자료실에 짱박아 놓았다가, 콜트레인이 확실히 유명해진 1960년대 초반에야 이들 녹음을 무단으로 발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리더작들이 Dakar, The Last Trane, Lush Life, Settin' the Pace, Standard Coltrane, Stardust 등으로, 완성도는 좀 들쭉날쭉하지만 하드밥 시절 콜트레인이 보여준 실험과 시행착오가 담겨 있는 귀중한 앨범들이다. 1958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새로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에 다시 합류했는데, 이번에 마일스가 들고 나온 아이디어는 [[선법]](Mode)에 기반한 모달 재즈(Modal Jazz)였다. 섹스텟이 낸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인 Milestones와 [[Kind of Blue]]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후자는 '재즈 팬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하는 음반'으로까지 회자될 정도로 지금까지 유명하다. 마일스 섹스텟 후반기였던 1959년에는 애틀랜틱과 계약해 완전히 자작곡으로만 구성된 앨범인 [[Giant Steps]]를 발매했다. 타이틀 곡에서는 어지러울 정도로 잦은 코드 변화를 구사해 비밥의 극단을 추구했고, 반대로 자신의 첫 번째 아내에게 헌정한 곡인 Naima라는 곡에서는 느리고 명상적인 모달 재즈를 보여주는 등 상반된 요소가 혼합된 논쟁작이었는데, 이후 콜트레인이 추구하는 방향을 제대로 암시한 것은 후자였다. 다만 앨범 녹음 직후 [[틀니]]를 하고 취주법을 새로 익히기 위해 약 반 년 가량 공백기를 가져야 했고, 1960년 10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녹음과 공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활동 재개 직후 Coltrane Jazz를 통해 이후 자신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쿼텟 멤버가 되는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 드러머 [[엘빈 존스]]와 첫 녹음을 취입했고, 또 프리 재즈 초창기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에릭 돌피, 오넷 콜먼, 돈 체리 등의 뮤지션들과 어울리면서 점차 전위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색소폰과 [[플루트]], 클라리넷 등 다양한 관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던 돌피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이 시기를 전후해 종래의 테너 색소폰 외에도 소프라노 색소폰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따금 플루트도 연주했다. 1961년에 애틀랜틱에서 [[임펄스! 레코드]]로 소속 음반사를 옮긴 뒤 11월에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빌리지 뱅가드에서 가진 공연에서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이 합류하면서 쿼텟 멤버가 완전히 확정되었고, 이 공연의 라이브 앨범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인 Coltrane, Ballads, Impressions, Live at Birdland, Crescent 등 중요한 앨범은 거의 모두 이 멤버들로 녹음되었다. 이들의 연주력과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3년 뒤 결성된 마일스 데이비스의 세컨드 퀸텟과도 곧잘 비교된다. 특히 마일스 퀸텟같은 경우 [[모던 재즈]]에서 [[퓨전 재즈]]로 넘어가는 그룹으로 자주 언급된다면, 콜트레인 쿼텟의 경우 모던 재즈에서 [[프리 재즈]]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그룹의 대명사로 취급된다. 물론 콜트레인 쿼텟은 프리 재즈로 넘어가는 동안 상당히 괴팍하고 과격한 형태의 음악을 보여주며 비평가와 청중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지만, 반대로 [[듀크 엘링턴]] 같은 구시대 거장이나 조니 하트먼 같은 재즈 발라드 가수와 협연하기도 하고 기존 발라드를 새롭게 편곡해 재창조하는 유연함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콜트레인의 팬들이 후기 음악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에 열광하는 이유도, 극단적으로 보이는 음악 가운데에서 길고 매력적으로 뽑아내는 발라드 감성의 선율미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1964년 녹음해 이듬해 내놓은 [[A Love Supreme]]을 통해 콜트레인은 완전히 프리 재즈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의 아들의 탄생에 대한 축복에 기인한다는 내용의 대규모 [[모음곡]]이었는데, 비록 라이브로 연주한 기록은 몆 번 없지만 지금도 호평을 받는 명작이다. 하지만 1965년 이후로 자신의 밴드에 대한 통제력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색소포니스트 [[파로아 샌더스]]나 드러머 라시드 알리 같은 극단적인 프리 계통 연주자들을 집어넣으면서 기존 멤버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이들 멤버의 경우 영입 과정에서 많은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의문 혹은 비판을 받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는 기자들로부터 '[[파로아 샌더스]] 같은 애들을 왜 끌고 다님?'이라는 꽤 노골적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Ascension(음반)|Ascension]]을 냈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모습이었지만, 리더로서 보여준 우유부단함과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부조화 등에 못이겨 1965년 11월에 Meditations 앨범 녹음 직후 타이너와 [[엘빈 존스]]가 탈퇴했다. 타이너의 후임으로는 자신의 부인 앨리스 콜트레인이 들어왔고, 드럼은 계속 알리 혼자 연주했다. 만년에는 점점 더 몽상적이고 Interstellar Space와 같은 우주 지향적인 음악을 추구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속 음악의 영향을 받아 그 지방의 전통 타악기 연주자를 게스트로 맞아들여 공연과 녹음을 하기도 했다. 1967년 3월과 4월에 각각 생애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녹음을 남겼고, 5월 7일 [[볼티모어]]에서 공연한 직후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롱아일랜드의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간암]] 판정을 받고 그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향년 40세로 타계했고,[* [[언덕길의 아폴론]]을 보면 당시 콜트레인의 타계가 재즈 팬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유해는 파밍데일의 파인론 묘지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